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문단 편집) ==== 항복 이후 ==== 파울루스가 항복하자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원수 진급을 취소시키려 했으나 이미 방송국을 통해 원수 진급 사실이 공표되었음을 알고 단념했다. 스베틀라나의 회고에 따르면 독일 측에서 포로로 잡힌 스탈린의 아들인 [[야코프 주가시빌리]] 대위와 소련이 잡은 포로 중 누군가, 아마도 파울루스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는 일화가 굉장히 유명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독일 측 문서적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스탈린이 독일에서 야코프와 누군가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보냈다고 이야기했다고 하지만 그 누군가가 파울루스인지는 알 수 없다. 항복 후 소련은 파울루스를 회유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였지만 파울루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자 그는 소련이 지원하는 자유독일국가위원회의 회장이 되어 소련군의 선무 활동에 앞장섰다. 히틀러는 파울루스가 자살하지 않고 포로가 된 직후 크게 화를 내면서 "얼마 지나면 파울루스가 모스크바의 방송에 나와 울며 불며 참회 성명을 내고 소련군이 내어 주는 아무 문건에나 사인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은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실이 되었다. 당시 소련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독일군 포로들은 1955년 포로 석방으로 서독에 귀국 이후에도 동료들 사이에서 (고위 장성이라 해도) 배신자라며 비난당했다. 이때 일본인들은 영화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왜 군인이고 원수나 되는 파울루스가 자살 대신 항복을 선택했는지 이해를 못했다고.[* 앤터니 비버,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종전 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측 증인으로 활동했고 이 때 소련 언론에선 그를 '스탈린그라드의 유령'이라고 불렀다. 이 때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전범으로 회부된 것이 아니라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파울루스는 자신과 참모본부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빌헬름 카이텔]], [[알프레트 요들]]에 대하여 불리한 증언을 끝내 거부했고, 이는 소련 측의 분노를 사서 결국 예정된 1945년 8월에 석방을 못하고 다른 독일군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1953년까지 억류생활을 한다. 하지만 말이 억류이지 그냥 모스크바에서 잠깐 거주하는 수준이었다. 그가 장성이라는 점과 소련에 협조를 한 덕이었다. 그에 비해 직접 전투원이었다가 포로가 된 다른 영관급 이하 장병들은 '''시베리아 행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